"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서간문 시리즈를 알고 있니? 이슬아, 남궁인 작가는 몇 년 전부터 SNS에서 눈여겨봐온 이들인데, 글쓰는 재료나 방식이 꽤나 다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기획이 놀랍고 신기했어. 그저 새롭게 떠오르는 유명인을 둘 엮어보자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어떤 둘 만의 케미스트리가 있을 것일까? 궁금했지만 그간 바빠서 잊어버리고 지냈어. 짐작할지 모르겠지만 지난 몇 달간 나는 심정적으로 조금 불안하고 힘들었거든. 여러 가지 너와 관계된, 그리고 너와 관계되지 않은 이유들로 더 이상 너를 만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한 것 때문에. 그러다 오늘 심심한 지하철 역에서 이슬아 작가의 마지막 편지가 올라온 것을 봤어. 그 길로 몇 달 치의 주고받은 편지를 다 읽어버렸네. 둘의 사뭇 다른 온도의 상냥함과 솔직함을 선뜻하게 느끼면서, 나도 드디어 너에게 제대로 된 편지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알겠지만, 얼마 전에 이사를 했어. 짐을 옮기고, 가구를 고르고, 구매하고, 조립하고,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을 청소하고, 고장난 곳을 수리하고, 전기와 인터넷을 신청하고, 장을 봐 냉장고를 채워 넣으며 일상을 꾸리는 일은 생각보다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더라. 그래도 무언가 집중해 할 일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하며 열심히 일했어. 그랬더니 모든 것이 며칠 만에 다 꾸며져버렸어, 기대했던 것보다도 아주 쾌적하고 아름답게. 누구에게라도 나의 새 집을 자랑하고 떠벌리고 싶었고, 너는 물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만, 그 마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어. 너는 얘기했었지, 셋방살이에서 룸메이트를 거쳐 드디어 독립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고. 너는 나의 지난 시절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사하는 것이 축하받을 일이었구나, 그동안 부족한 나를 너는 많이도 봐주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서운하고 속상해서 더 이상 자랑하고 싶지 않았어.
이것은 조금 과민반응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작은 부분들에서 너와 나의 한강만큼 떨어진 차이를 느끼고는 했어. 내가 미국에 와서 룸메이트를 전전했던 것은 아직 혼자 정착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으므로 나는 내 처지를 아쉬워한 적도, '드디어' 혼자 살게 된 것을 '개선'이라 여긴 적도 없었는데. 너는 어쩌면 별 생각 없이 축하를 건넨 것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의 성공에 대한 야망이 부담스러웠어. 네가 나를 정말로 어떤 의미에서 재고 판단하고 있었는지, 혹은 그저 나의 열등감, 피해의식이었지는 모르겠다.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어. 어차피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고, 너가 무척이나 취해서 농담삼아 말했던, 결혼하고 싶은 이상형의 조건을 기억하는 나로써는 어떤 식으로든 의심을 하고야 말 것 같아서.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너는 놀라워 할 지도 모르겠다. 왜 진작에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네가 언제나 편하게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어, 라고 하며...... 아니지, 너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 같아, 우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서 바로잡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나도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와 문제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어, 지금의 네가 좋으면 그걸로 된 것 아니냐고. 너와의 만남은 언제나 놀랍고, 신선하고, 즐거웠어서 더 오래 대화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그래서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웬만해선 꺼내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절대 아귀가 맞을 수 없는 다른 쌍의 블럭이라 할지라도, 조금은 더 잘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게 아쉬워. 너와 연애하고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과정 과정에서 서운한 부분들을 풀지 않고 그대로 남겨놓아서 이젠 친구로도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 더 잘 할 수, 아니, 더 잘 하려고 더 노력해볼 수 있었는데 적당히 넘겨짚고 적당히 맞추어주면서 당연하게 멀어져버린 것.
어쩌면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충분한 시간이었지,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도 발견하고 캐낼 수 있게 하는. 시간을 때우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문득 그 진의가 궁금해지고, 결국엔 서로의 괴상하지만 알면 좋을 의식 속 진주를 캐올리는 과정이 얼마나 지리하지만 소중한지. 내가 원했던 것은 그런 관계였어, 꼭 서로가 연인임을 확언하고, 기념일엔 약속된 데이트를 하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틀에 박힌 것이라기 보다는. 심심하거나 찜찜할 때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상대가 되어주는 것, 아무 때나 아무 생각 없이 전화벨이나 초인종을 누를 수 있게끔 낮은 문턱을 내어주는 것. 나는 꽤나 예민해서 말꼬리나 뉘앙스에 많은 느낌을 받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파고들 만큼 부지런하지가 않아서 대부분은 무던히 넘겨버리는 사람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무척이나 아끼고 신경쓰는 사람이었고, 그에 비해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작고 사소했던 찜찜함들이 빛을 보기 전에 내 마음 속 구석에 쌓여버리곤 했던 것같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니 사실은 가장 처음 네가 나에게 우리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부터, 나의 알량한 자존심인지 자존감일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어. 나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는 너를 멀리해야 한다고. 현실이야 어떻든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기에는 부족할 뿐인 나의 에고와, 나 스스로도 모를 숱한 방어기제로 무장한 무의식이 말이야. 내가 정말 너를 차단해버리기 전에 우리가 좀 더 일상적이고 심심한 시간들을 자주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얘기하면 바쁜 너를 탓하는 것 같지만...... 내가 너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 있다면, 막역한 관계를 원한다고, 익숙한 듯 당당하게 말했으면서도 사실은 나부터가 찐한 연애를 많이 해봤거나 관계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야. 혹시라도 만약 내게 그런 것을 기대했던 거라면, 먼저 표현하고 다가와주길 바랐다면...... 나도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사람인데, 지나치게 예의와 형식을 신경쓰느라 앞서는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숙맥이 되곤 한다는 거야, 진심일수록 더욱. 나의 복잡한 예민함과 조심스러움을 조금은 이해하겠니?
그래서 얘기하지 못했어. 내가 원하는 것을 나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고, 너는 나와는 다른 것을 원했고, 나의 에고는 형식과 예의를 내세워서 관계를 끊어버리고, 너와 나는 대화를 하면서도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충분하지 못한 시간동안 에둘러가는 이야기만을 하다가 우리는 이렇게 끝이 나 버렸네. 그래도 나와 가장 비슷한 영혼과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너였는데 말이야. 너와 했던 짜릿한 대화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또 다시 있을까?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공통점을 가진 너를 드디어 만났는데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니. 너로 인해서 또 하나의 조건 - 안정적인 믿음을 주는 자상한 사람 - 이 추가된 나의 이상형은 과연 실현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연인이든 친구든 말이야. 사람들을 수없이 스쳐보내면서 얻는 것이라고는 나 스스로를 보호할 또 다른 조건들이라니. 어떻게 하면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