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듯 말 듯 하는, 축축하지만 기분좋은 바람이 불던 오늘, 센트럴 파크에 산책을 나갔다.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집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다가 오후 느지막히 겨우 택스 리턴이나 하고 나온 참이었다. 요 몇 주 간 이상하다 싶을 만큼 피곤했었는데, 비타민 D를 먹기 시작한 덕분인지 간만에 몸도 개운했다. 가볍게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언제 봐도 좋은 저수지 풍경에 걸음을 멈추었다. 하아, 여유롭고 기분좋다--라고 하기에 딱 알맞은 컨디션이었는데.
그런데 나는 뒤에서 오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너는 파란 모자를 쓰고 뛴다고 했었는데...... 매일 바쁜 너라는 것을 알면서, 그 전에는 이렇게 기다리지 않았었는데, 사람이란 정말 웃기지. 월요일 저녁, 너를 딱 한 번 우연히 본 뒤부터는 공원에 올 때마다 널 마주칠까봐 신경이 쓰이는 거야. 이 넓은 도시에서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너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정말이지 이성적인 사람이 못 되는구나.
그러니 생각이 나더라, 헤어지는 순간 너는 나에게 말했지. 결혼할 때 꼭 얘기해줘, 축의금 정말 많이 낼게. 너는 어쩜 그렇게 순진하고 진심인 말투로 저런 말을 했을까? 네가 공감능력이 떨어지는게 컴플렉스라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어, 라고 생각하며 혼자 풉 하고 웃었다. 아직도 이해는 가지 않지만 말이야. 아무리 감정이 부족한 너여도, 욕심나는 것은 있을 것 아니야? 네가 평생 꿈꾸었던 회사 사장이 면접 자리에서 네게, 당신은 우리 회사에는 부적합하지만 다른 회사에는 합격하실 겁니다, 라고 한다면 너는 그걸 곱게 칭찬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니? 얄미운 마음 하나 없이? 궁금하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곱씹으며 뛰던 중에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원래 이래, 이것 저것 다 해보고 경험해봐야 하는게 나였어, 아직도 확신이 없냐고 나 스스로를 꾸중하는 것은 내가 왜 나냐고 억울해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수 십 가지 특별활동 중에 굳이 남들이 하지 않는 학춤, 가야금, 방송, 컴퓨터, 골프 따위를 심지어 욕심으로 많이 고르는 게 어릴 때의 나였고, 비행기타고 놀러 간 여행지에서 앞으로 평생 살 일이 없을지도 모를 콘도 청약을 호기심에 구경하는 게 지금의 나야. 천방지축 여기저기 부딪히며 그래도 어디론가 방향을 맞춰 나아가는게 나의 천성이라면, 인간관계에서도, 커리어에서도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야만 한다는 거잖아. 내가 나다운 무언가의 결론이 있는게 아니라, 알 수 없을 그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나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왜 일면 새롭게 느껴졌을까?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던 너의 말이 나에겐 상처였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같아. 네 말은 그냥 사실 그 자체야, 너나 나의 노력이나 의도나 열정과는 상관없이. 우린 정말이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나보다 먼저 알았나보다. 나는 우리가 성격이 많이 달라도 좋아하는 건 비슷해서 보완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어. 인생이란 반직선의 특징은 그 선의 굵기나 색깔이나 속도나 여타 성질보다도 단 두 가지, 시작점과 방향에서 결정된다는 가장 쉬운 수학의 원리를 잊었던 거야. 나와 비슷한 사람, 다른 사람, 탐나는 사람, 미운 사람이 수없이 만나고 스쳐지나가지만 그것은 인생의 어느 잠깐의 장면일 뿐, 오래 함께 가는 것은 결국 같은 방향의 선을 탄 사람이라는 것을. 나의 방향은 열린 결론에 모험하고 도전하며 행동하는 것이고, 너의 방향은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인내하는 것이어서, 우리의 인생 노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